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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환유를

흔적으로 남은 통증을 기억하는 자아의 존재의식 김홍정 (소설가) 1. 거울을 짊어지고 거리를 걷는 소설가 손영미 소설가의 첫 작품집 『누가 환유를』의 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첫 작품집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읽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나 그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의견을 말한 적이 없어 거절하려다가 결국 승낙했다. 발문을 쓰기로 했지만 손영미의 작품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주저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충남작가회의>와 <금강의 소설가들>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고, 가끔 손영미의 작품을 지면에 발표하기 전 먼저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주문화재단이 출발하면서 지역 작가들의 작품집 출간을 돕는 기획에 참여했고, 이 작품집이 재단의 지..
흔적으로 남은 통증을 기억하는 자아의 존재의식



김홍정 (소설가)



1. 거울을 짊어지고 거리를 걷는 소설가



손영미 소설가의 첫 작품집 『누가 환유를』의 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첫 작품집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읽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나 그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의견을 말한 적이 없어 거절하려다가 결국 승낙했다. 발문을 쓰기로 했지만 손영미의 작품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주저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충남작가회의>와 <금강의 소설가들>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고, 가끔 손영미의 작품을 지면에 발표하기 전 먼저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주문화재단이 출발하면서 지역 작가들의 작품집 출간을 돕는 기획에 참여했고, 이 작품집이 재단의 지원을 받는 신진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작가에 대한 어떤 견해보다는 작품집에 실린 작품을 읽고 느낌을 말하는 독후감 정도로 본다면 부담이 덜 하겠다.



손영미는 공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2017년 공주시와 공주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웅진문학상> 공모에서 단편 <아직도 미혹>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단편 <소안 가는 길>로 2018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수상한 이후 단편 <자메이카>를 ≪월간문학≫에, 단편 <그때 그 봄날>, <누가 환유를>, <달팽이>를 충남작가회의 ≪작가마루≫에 연이어 발표하는 창작열을 지니고 있다. 비록 공주문화재단 신진작가 공모에 지원하여 작품집 출간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신진작가라기보다는 이미 정예 작가의 반열에 섰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때마침 제9회 직지소설문학상 심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손영미는 중편 <빛의 소멸>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니 작가로서의 내공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주문화재단이 구분한 신진작가 창작집 출간 공모전의 의미가 결코 작품의 수준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작품집 출간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은 적절하다. 어쨌든 손영미의 첫 작품집 『누가 환유를』은 신진의 기세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정도正道를 명확히 알고 있는 튼실한 작가의 출현을 입증하기에 넉넉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작품의 소재로 풀어내면서도 젊은이들이 지닌 거리낌 없는 감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벽지의 꽃무늬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삶 말고,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나도 리나처럼, 나만의 자메이카를 꿈꾸고 싶었다.」 (<자메이카> 중)



리나는 타의에 의해 대안학교로 보내져 오카리나를 연주한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에는 초록과 검정, 노란색 스카프를 꼬아서 화관처럼 두르고 집시가 되어 자메이카로 향하는 꿈을 꾼다. 굳이 자메이카를 어떤 특정한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서도, 제한된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운 자신의 영역으로 이를 수 있는 낭만적 서정을 마음껏 드러낸다. 나만의 자메이카. 비록 훗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따지는 일은 참으로 구태의연하고 구차하다. 이런 싱싱한 젊음을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는 문장이 활기차다. 부담스러운 필요 이상의 묘사와 설명 없이, 늘어지지 않는 단문에서 손영미의 젊은 작가로서 면모가 드러난다.

스탕달은 ‘소설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이고, 소설가는 그 거울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단정했다.(방민호 교수의 『통증의 언어』에서 인용) 스탕달이 살던 시대는 나폴레옹이 혁명으로 득세했다가 몰락하고 왕조가 재건된 혼란의 시기다. 이렇게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탕달의 소설이 당대의 현실을 바탕으로 영웅주의와 쾌락주의가 혼재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한국 소설을 읽다 보면 대부분 가난과 소외의 문제를 다루며 결핍을 말하고, 사회 부조리가 드러난 구조에서 억압당하는 실체를 그리고, 실현 가능성이 결여된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손영미 소설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 소설 속에 세운 소안 마을을 보는 간절함



『누가 환유를』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우선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바탕이다. 그 사랑은 현실의 고루한 사정으로 인하여 행복한 결말을 이루지 못하나 등장인물들은 그 사랑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주변인들의 시선을 도외시한다. 물론 욕망이 강하여 집착에 이를 수도 있겠으나 안타까운 것은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여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이 소설들은 대개 결핍과 소외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들을 설정했는데 등장인물들이 겪는 결핍과 소외는 사회 구조적인 부조리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5·18과 세월호 침몰 사건에 관여한 공권력의 동질성(<그때 그 봄날>), 부모의 불편 때문에 대안학교로 보내진 소녀들(<자메이카>), 뇌수막염과 교통사고로 이어지는 환유의 고통과 아들의 성공에 집착하는 희경의 욕망(<누가 환유를>), 시한부 삶을 사는 연민의 사내와 그를 바라보는 미혹의 여자(<달팽이>), 단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나 자연의 힘 앞에 흔들리는 현실의 이중성(<소안 가는 길>), 전후 세대의 단절과 미해결 분단의 고통을 겪는 실향민(<고향의 봄>),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여인의 집착과 며느리를 보내려는 시어머니의 의도적 횡포(<아직도 미혹>) 등이 그러하다.



손영미 단편집 『누가 환유를』 속의 인물들이 지닌 고통은 촘촘히 자리 잡은 삶의 흔적을 기억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삶의 흔적이 결코 어느 개인의 분화된 단면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공감한다면 동시대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불편한 부채의식으로 남게 된다. 소설가의 몫이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라면 시대의 아픔을 거울 속에 드러내고 반사시켜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확산의 사고는 어찌 보면 선동적이다. 철저한 사실성에 근거하게 되니 리얼리즘 소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고통을 알고 있는 손영미는 이런 구조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안所安’을 찾아낸다. 소안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작가의 바람과 현실에서 벗어난 대안적 공간으로,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선택하고 인생을 거는 모험의 공간이기도 하다.



「소안을 다녀온 이후 소연은 앞뜰의 도라지꽃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음 주 흰색과 보랏빛이 뒤섞여 낮은 담장 밑에 올망졸망 피어나던 꽃이 다시 보고 싶어 소안 가고, 막 피려고 몽글몽글 올라오던 몽우리가 활짝 피었을까 궁금해서 또 소안 가고, 꽃 지는 것이 아쉬워서 지기 전에 한 번 더 보려 소안 가고, 그렇게 소안을 드나들다가 소연과 정우는 결혼을 했다.」 (<소안 가는 길> 중)

소안은 도라지꽃 몽우리가 맺히고 피고 지는 곳이다. 빨랫줄에는 노란색, 흰색, 줄무늬, 물방울무늬 등의 빨래가 따뜻한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보송보송 마를 것이고,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 때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것이고, 뭇국을 끓이고, 두부를 조리고, 호박을 볶아서 여릿여릿한 얼갈이김치와 함께 정갈한 아침상을 받는 곳일 것이다. 그러니 소안을 떠날 수 없다. 비록 소안에서 농사짓고, 아기 낳고, 글 쓰는 삶을 꿈꾸던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소안을 떠나지 않고 남편 없이도 농사짓고, 입양하여 아기도 키우고, 글도 얼마든지 쓰겠다고 고집하는 영주의 단호함이 오롯한 ‘아직도 미혹’한 곳이다.

그렇다면 ‘소안’이 소설집 『누가 환유를』에서 차지한 역할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자메이카’와 완도의 ‘분교’와 예술가의 꿈을 키우며 그리는 ‘달팽이’와 지리산 실상사에서 조계사까지 걷는 평화와 나눔의 순례에 참여한 공동체 ‘나누리’, 이산가족들의 모임 ‘황해로’와 다를 것이 없는 동질의 공간이다. 어쩌면 손영미는 첫 작품집 『누가 환유를』에 이런 공간과 모임을 화두로 던지고, 그 공간과 모임에서 이루고자 하는 새 세상의 힘을 세우며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 작품집에서 이런 일련의 노련함으로 꿈의 세상을 드러내는 작가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다.

하지만 손영미는 불안하다.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다.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비 내리는 하늘과 밭을 바라만 보았다. 호박은 제대로 크지도 못한 채 매끄럽고 고운 몸매가 무너져 내렸다. 토마토는 손으로 살짝만 움켜쥐어도 힘없이 부서지며 빗물을 주르르 토해냈다. 아기 새끼손가락만큼 달리기 시작하던 고추도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검게 변해갔다. 연꽃잎을 닮은 토란의 넓은 잎사귀는 우산이 되어 빗방울을 또르르 굴렸다.」 (<소안 가는 길> 중)



「소안마을로 가는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갈 곳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시경은 집으로 가는 길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길마저도 희미한 초승달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아마득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미혹> 중)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지 않았어. 그러나 우린 무조건 바다로 뛰어들 순 없었어. 바다는 춥고, 어둡고, 그래서 두려웠어.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났지. 그러나 슬픈 세월에 모진 세월이 켜켜이 포개어져 흘렀어도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배가 있었어. 나는 배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어. 그때, 그 봄날에도 난 여전히 구경꾼이었지.」 (<그때 그 봄날> 중)



현실로 가로지른 벽 앞에서 작가는 통곡했을지도 모른다. 거울을 짊어진 소설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현실이 답답하여 구경꾼이었음을 고백한다. 소설가가 모두 깃발을 뽑아 들고 앞서 도로를 달리는 전위일 수는 없다. 예술인의 간절함은 작품이 지닌 반향을 기대하고 물러서 있는 것이다. 물론 가상한 용기를 내어 쉰 목소리로 열변을 토할 수도 있다. 나무랄 사람은 없다. 다만 젊은 작가 손영미의 우렁찬 소리가 계속 울리게 될 것은 이 작품집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안으로 향하는 간절함이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3. 흔적으로 남은 통증의 근원



소안이 손영미가 찾아낸 인간의 욕망으로 상처 입은 아픔을 치유할 첫걸음이라면 자메이카는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손영미의 자유로운 공간이다. 인간의 삶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면 자메이카는 새로운 현실이다. 물론 젊은 작가가 이런 현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낯설지도 않을 것이다. 극명한 자아의 존재의식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선명하다. 하지만 이런 현실로 나아가기 위해선 이 사회 구조와 결합한 객관화된 자아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이 현실을 동시대로 인식하는 이들이 지닌 책임의 한계와 전가로 인해 자리잡은 부채의식이다. <그때 그 봄날>은 이런 부채의식이 뚜렷하다.



<그때 그 봄날>은 3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두 사건이 소재이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시기에 완도 근처 섬에 근무하던 다섯 명의 교직원과 젊은 여교사 채은경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죽음을 막지 못한 무력함에서 비롯된 자기 환멸과 책임 전가로 나타난 갈등과, 다른 하나는 2014년 세월호 침몰로 인해 희생된 학생들을 기억하는 동시대의 소녀 세영이 지닌 자기 환멸의 통증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남은 자들에게 자기 환멸과 반성, 책임의식을 요구한다. ‘넌 내게 그때, 어디 있었냐고 물었지?’라고 묻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을 겪는 자들에게 들이대는 책임의식의 분담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슬픔을 견디는 힘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잊으려 하는 도피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더 선명한 고통의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론 인물들의 치열한 내적 번민과 지독한 자기모멸의 예리한 묘사는 아쉽게 부족하다. 그럼에도 아픔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또한 손영미의 소설 기법이라 할 것이다.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앞세워 철두철미하게 두려움에 지친 이 땅의 민중들을 억압했다. 진실을 위장하여 감추고 온갖 패악을 서슴지 않았다. 민중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지나친 현실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면서도 그 오류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환경으로 자기 합리화하거나 굳이 기억하기 싫은 시절의 일이라 여겨 잊으려 했다. 지독한 자기 모멸이다. 그렇다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합리화에 매달릴수록 그 일들을 잊지 못하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통증이란 무엇인가? 감각을 느끼는 말초신경섬유가 반응하여 불편한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감각, 신경, 정신적 고통으로 나타날 것이고 실재하지 않으나 느끼는 환상도 통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살며 회피할 수 없는 공통적인 불편함을 느꼈으나 그냥 지나쳤다면, 그 불편함은 고통으로 기억되어 언제라도 통증으로 발현될 수 있다. 대다수의 문학 작품들은 그러한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지만 어떻게 견디고 버텨내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대안적인 현실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손영미는 이런 작가적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사랑으로 가슴 설레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던, 스물여섯 해에서 멈춘 은경 언니의 그때, 그 봄날이.’라고 어느 봄날의 한 이야기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성장통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현실이 이 사회 구성원의 집단 통증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고 묵언하고 있다.



아무리 지나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단의 현실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원죄적 고통이다.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시대의 소산으로, 점차 당위로 여기던 민족적 감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그 목적을 의심받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곧 전후 세대 사이에서 비롯되는 간극은 더 벌어지고 좀처럼 합리적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이념이 소멸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관련된 논쟁은 이념을 뛰어넘어 경제적 손실을 따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분단에 대한 작가들의 참여는 그 이념의 차이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의 소재조차 삼지 않으려 하는 현실은 어쩌면 분단 조국의 현실을 애써 모른 척하려는 세대의 요구에 굴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손영미는 <고향의 봄>에서 봉구 가족을 통해 분단으로 비롯된 해체되는 실증적 현실을 다룬다. 어쩌면 이 시대에 분단을 보는 이념적 성찰은 해묵은 일이기도 하지만, 단 한 줄의 이념적 성찰도 없이 그저 가족의 범주에서 분단을 바라보는 기억으로 끌어낸다. ‘황해로’는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이들의 모임이다. 전후 세대들은 그 모임의 순수성을 의심하지만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가족이 되고 싶은 것이 ‘황해로’에 모이는 이들의 마음이다. 그들의 소망은 국경을 넘어 편지로 연결되는 간절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북쪽에 두고 온 동네 지도를 가슴에 품는 이유이다. 손영미는 이들의 진정성을 전후 세대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봉구가 지도를 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동안 모은 지도도 꽤 많아졌다. 지도를 보며 손가락으로 안악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행동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되었다. 더하여 언제부터인가 손가락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마치 그곳이 고향인 것처럼,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힘껏 문지르기도 했다. … 그러나 영영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고향의 봄> 중)



「은수도 아버지처럼 황해도 안악에 오른손 둘째손가락을 살짝 올려놓고 가볍게 톡톡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향 집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할머니, 봉선이 고모와 함께 해바라기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은수는 그 풍경 속으로, 아버지의 기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고향의 봄> 중)



분단은 한국 작가들에게 어느 한쪽에 설 것인지를 요구하는 잣대로 이해되었다. 이념적인 성찰이 아닌 편 가르기의 양상이 심화 되어 민족을 바라보는 잣대로 편 가르기를 했다.

어느덧 21C가 되어 지구촌에서는 이념의 굴레가 허물어졌고 상당 부분 문학적 성과가 있었다. 특히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온 최인훈, 손창섭 등 작가들의 성과는 물론이거니와 북에 남은 홍명희, 백석, 임화 등 작가들의 작품도 회자 되니 분단은 문학에서 굴레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고향의 봄>을 읽으며 느낀 소감이다.



통증의 근원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욕망과 집착이다. 욕망은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임계점을 향하여 치닫기 마련이다. 그리고 놓을 수 없는 집착으로 변질되곤 한다. 더구나 그 욕망이 자신의 한계를 대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이될 때 혼란스러운 이중성을 노출하고 구조적인 사회문제로 비약한다. <누가 환유를>은 우리 사회가 지닌 부모 세대의 욕망이 분출되면서 다음 세대의 삶을 어떻게 유린하는지 일깨운다. 불편한 현실에 대해 화자는 애써 도외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직면한다.



「희경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환유가 채워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꺾인 날개를 보상받고 싶었다. 그래서 환유가 힘들어할 때면 조금만, 조금만 더 높이 날아 보자! 하며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가볍게 토닥였으나 그때마다 환유는 어깨가 바스러질 것처럼 아프다는 걸 희경은 까맣게 몰랐다.」 (<누가 환유를> 중)



「환유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별의 몸과 겹쳐졌다. 별 위에 눕는 순간 환유는 몸과 마음이 나른하고 느긋해졌다. 환유는 이 편안한 순간을 별과 함께 있고 싶어 별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별의 몸은 평소처럼 포근하고 보들보들하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별의 다리를 더듬으며 환유는 의식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환유는 의식의 끝을 향하여 천천히 다가갔다. 그 끝에 존내쉬의 아들이 아빠를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별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영어 단어, 수행평가, 봉사, 바람의 방향, 전이원소, 빛의 속도, 해피하우스, 축구공, 밤하늘의 별, 별, 그리고 또 별…….’」 (<누가 환유를> 중)



별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간다. 환유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난제를 어린 고양이 ‘별’에 쏟는 애정으로 대체한다. 별은 위기의 순간에 환유를 향하여 뛰어들어 운명을 함께 한다. 환유는 이미 또 다른 별로 향하고 있다. 그 별은 희경의 욕망과 집착이 사라진 곳이다. 그렇다고 그 별이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 역시 흔적으로 남은 통증의 근원일 뿐이다.

4. 소설을 읽는 즐거움과 과제

손영미 단편집 『누가 환유를』은 흥미롭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소설가의 복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는 문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손영미는 1인칭 화법을 구사한다. 상당수의 독자에게서 1인칭 소설이 더 친근하게 읽힌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작가의 내면의식에 쉽게 접근하여 작품의 주제의식과 의도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때 그 봄날>은 화자가 들려주는 형식을 취해 더 독자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문학 강연에서 독자들로부터 등장인물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단순히 독자의 호기심이라고 나 몰라라 하면 곤란하다. 1인칭으로 쓰되 3인칭으로 읽힐 수 있게 쓰는 것이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서술의 혼란을 겪는다. 객관화된 1인칭 진술의 어려움 때문에 인물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는데 흔들리지 않는 시점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은 중견에 이르기까지 겪는 일이니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다.

어쨌든 문체는 늘 작가가 고민하고 되새김질하여 깎아내는 조각상처럼 예리하고 단아해야 한다. 그러니 허투루 기교를 앞세우거나 공연한 수식으로 장황하다는 느낌을 주어선 곤란하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이 작품집은 작가가 충분히 고민하여 문장을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손영미는 작품 속의 공간과 모임인 ‘소안, 나누리, 황해로, 안악’ 등의 이름 짓기에서 작가의 진지함을 드러낸다. 안악처럼 실제 지명일 수도 있고, ‘소안마을은 지도에도 없고 내비에는 더더욱 잡히지 않는 곳’이라 밝혔으니 임의의 지명일 수도 있다. 그래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실제 지형과 주변을 연상하여 소안을 찾아가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성향이 있다. 고마운 일이다.

첨언하듯, 한마디 더 해야겠다. 손영미 첫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여성이다. 물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내용과 구조로 미루어 억압적 여성성을 벗고자 하는 젠더적 선택이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에서 억압적인 여성성을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왜곡된 여성성에 대한 접근을 전제하면서 으레 근대성의 모순으로 비롯된 여성성이 통상 범하는 민족주의, 전통주의에 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다. 앞으로 손영미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탈코르셋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은 점차 구조화된 사회를 공정성으로 리셋하려는 경향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글을 먼저 읽는 기쁨을 누렸다. 손영미 소설가의 새 작업을 기대하고 문학적 성과를 소망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홍정_ 소설집 『창천이야기』 『그 겨울의 외출』, 연작소설 『호서극장』,

장편소설 『의자왕 살해 사건』 『린도스 성의 올리브나무』, 대하소설 『금강』 10권
2017년 웅진문학상을 수상하고 201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2019년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 넥스트페어 공모전에서 <642년생 궁녀 연부경>이, 한국소설가협회에서 <2019 신예작가>로 선정되었다. 2021년에는 직지소설문학상에 <빛의 소멸>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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